julio@fEELING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 서론 발췌 본문

To World (output)/유료 習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 서론 발췌

julio22 2024. 9. 18. 12:17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책인데, 서론이 마음에 들어서... 교보문고 페이지에도 서론은 안보여주네! 소장하고 싶은 책인데, 언제 읽을지 자신하지 못해서^^;

 

서론에 언급된 역사서 3권 우선 빼놓았음.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West) 1932
주로 '서구'를 그리스·로마 세계와 비교하는 내용인데, 예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슈펭글러는 문명이 외부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실체라고 보았고, 문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도 대체로 예술과 철학이라 여겼다. 각 문명은 저마다 깊숙한 곳에 '영혼'을 간직하고 있고, 이것이 문명에 배어들어 문명을 이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0
 토인비는 20세기 초반 유럽 세계의 전형적 소산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사회 진화론자였던 그는 문명이 유기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문명은 자연환경 속의 '도전과 응전'을 통해 등장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 속에서 탄생, 성장, 붕괴, 해체라는 공통된 주기를 겪는다고 보았다. 엘리트주의자로서 토인비는 이러한 문명의 역사에서 중대 요소를 이루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믿었다.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 - 서구의 발흥(The Rise of the West)

맥닐은 자신의 책에 대해 나중에 틀린 부분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만 읽었음.

 

토인비만 들어봤고, 모르지만, 우선은 세계사를 한바퀴로 제대로 사실 중심으로 이해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우리나라 역사만 봐도 얼마나 복잡겠는가? 그런데 세계사는 당연히...

 

도서관 역사 부문에서 우연히 본 책인데, 서론이 마음에 들어서, 아직 본문에 들어가보진 못했음. 하지만 서론을 통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해 해야 하는지 공감하는 부문이 많아서 ..., 거기다, 작가의 서술방향을 알아야 이 책을 구입하고 싶지 않겠는가? (저작권에 걸리면 연락주세요. 삭제하겠습니다.^^;)

 

더보기

서론

세계사

세계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세상에 존재해 온 개개 국가와 제국, 문명의 역사를 한데 추린다고 세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국가, 제국, 문명 등의 구성단위에 담긴 공통의 주제는 물론, 그것들이 상호작용해 온 방식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뿐인가, 다양한 인간 공동체 사이의 지식과 기술의 전파 역시 그런 접근으로는 추적 불가능하다. 세계사는 반드시 공통의 주제와 발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하되 어느 한 집단의 경험에 치중하는 일없이, 각기 다른 인간 공동체 모두의 경험을 담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는 심한 결함과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책의 근본 논지다. 그러한 결함은 뿌리 깊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 유럽 중심주의는 '서구 문명'을 세계사의 주된 동력이라고 보며, 서구 문명 안에 인간 사회와 인간 사고의 모든 훌륭하고 진보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서구 이외의 전통과 사회가 가진 역할과 중요성이 간과되고 무시되곤 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 사람 대다수의 경험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 책은 인간의 역사를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세계사의 집필에서 가장 흔히 시도되는 방법 중 하나가 일련의 '문명'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맨 처음으로 시도한 이는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로, 1932년에 번역되어 나온 서구의 몰락 (The Decline of West)』이 그의 주저다. 주로 '서구'를 그리스·로마 세계와 비교하는 내용인데, 예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슈펭글러는 문명이 외부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실체라고 보았고, 문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도 대체로 예술과 철학이라 여겼다. 각 문명은 저마다 깊숙한 곳에 '영혼'을 간직하고 있고, 이것이 문명에 배어들어 문명을 이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식의 접근법으로 가장 유명한 책은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쓴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로, 1930년대 초반부터 근 30년에 걸쳐 열두 권이 출간되었다. 토인비는 20세기 초반 유럽 세계의 전형적 소산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사회 진화론자였던 그는 문명이 유기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문명은 자연환경 속의 '도전과 응전'을 통해 등장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 속에서 탄생, 성장, 붕괴, 해체라는 공통된 주기를 겪는다고 보았다. 엘리트주의자로서 토인비는 이러한 문명의 역사에서 중대 요소를 이루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믿었다. 토인비 이후에도 나름의 체계를 구축해 온 사가가 여럿 있다. 피티림 소로킨(Pitirim Sorokin)은 『사회·문화적 동력(Social and Cultural Dynamics)』에서 문명은 '문화적 상위 체계'이며, '관념', '감각', '이성'의 주기적 단계를 차례로 거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책을 집필한 캐럴 퀴글리(Carroll Quigley)는 사회가 '기생 사회'와 '생산 사회'의 두 종류로 나뉜다고 보고, 이들이 각자 나름의 '확장 수단'을 지닌다고 여겼다. 좀 더 최근에 들어서는 데이비드 윌킨슨(David Wilkinson)이 '중심 문명'을 주장했다. 근 4000년 전에 하나로 통합되었던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후 (일본이 통합되는 시점인) 1850년에 이르기까지여타 문명에 대한 통합을 계속해 결국 하나의 단일한 세계 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의 『서구의 발흥(The Rise of the West)』도 본질적인 면에서 '문명적 접근법을 취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이들 구성단위 간의 상호작용을 밝혀내고, 모든 문명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친 힘이 무엇인지 설명해 내는 데 주력했지만 말이다.

이런 접근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문명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이며, 이제껏 지구에 문명이 몇 개 나타났는지에 대해 의견이 전혀 일치되지 않고 있다. 토인비만 해도 작업 초반에는 문명을 스물세 개로 나열했지만, 막상 막바지에 이르자 목록이 스물여덟개로 달라져 있었다. 퀴글리의 경우 문명은 열여섯 개뿐이라 여겼다. 이와 달리 열아홉 개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일부 사가는 일본을 '극동' 혹은 '중국' 문명과 떼어 생각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 아울러 중국을 나머지 아시아와 분리해서 보는 역사 접근법도 있다.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화를 별개 문명으로 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조로만 보는 사람도 있다. 정통 기독교 문명이 과연 따로 존재하는지, 이슬람 문명이 기존 문명의 유산과 전혀 별개로 존재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히타이트족과 유대인 집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의 문제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다. 의견이 합치된 곳은 딱 하나, 별개의 '이집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뿐인데, 이마저도 사람들마다 시작 연대는 2500년 이상, 종말 연대는 거의 10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문명을 기반으로 세계사를 연구할 때 생기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는 문명의 성격이 대체로 '고차원 문화'의 특징, 즉 문학작품(특히 '위대한 저작들)과 철학, 종교, 예술 양식을 갖고 정의된다는 점이다. 이들 활동들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 내 소수 엘리트층만 담당했는데도 말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세상 사람의 태반이 문맹이었다.) 따라서 세계사를 논하면서 '문명'에 방점을 찍으면, 그러한 요소를 인간 역사에서 지나치게 중시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좀 더 면밀히 탐구해 보면 이들 '문명'은 거의 제각각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과 서유럽만 봐도 분명하다. 중국과 서유럽에 각기 다른 문화가 생겨난 것은 인간 사회의 발달 방식이 달라서이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두 지역이 그만큼 큰 차이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명이 어떤 '본질적 특성'을 가진다는 생각, 나아가 그런 특성이 세월을 건너뛰어 후대로까지 전수된다는 생각도 아주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특정 사실을 간과한 것으로, 중국과 서유럽 모두 2000년 전 조건과 비교해 봤을 때 거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다. 문명이 가진 특성 중 세월을 건너뛰어 후대로까지 전수되는 부분은 실제로는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문명사적 접근을 취해 본질적으로 '지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면 인간 역사 전반을 살피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이는 각자 고유한 발전 패턴을 보이는 사회, 경제, 기술, 군사, 전략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어떤 문명을 수천 년 전에 존재한 다른 문명과 비교하는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경제적·기술적·사회적 발전을 무시한다는 면에서 온당치 않다.

개별 문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문명이 자율적 단위이며 나름의 고유한 동력에 따라 발전한다는 사고를 피하지 못한다. 이는 세계사의 근본 특징 두 가지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 인간 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제와 기술의 배경을 보지 못한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간 사회가 고차원 문화의 몇 가지 양상과 관련해 갖는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유용한 방법이다. 토인비는 6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초창기 '문명'의 역사에서 공통된 리듬을 여럿 찾아냈다고 했는데, 사실 이는 초창기 농경사회와 제국의 어디에서나 나타난 공통된 특징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문명에 초점을 맞추면 다양한 사회의 연관성은 물론 사회 간의 사상과 신앙, 기술의 전파를 간과하게 된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철저한 고립 상태에서 발전한 문명은 아메리카 대륙 문명밖에 없었다. 제각각 달랐던 그 모든 인간 사회가 차츰 긴밀해져 하나로 뭉쳐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사를 이루는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세계사를 보는 가장 흔한 접근법은 '서양 문명'의 안경을 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유럽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전통으로, 19세기에 생겨난 유럽 우월주의에 연원한 바가 크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애초에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생겨나, 이윽고 '서양 문명'의 진정한 본산이 되는 땅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미노스 문화를 이룩한 크레타섬, 미케네 문화를 이룩한 그리스가 바로 그런 땅이었다고 여겨지며, 이곳을 토대로 '고전 시대' 그리스와 로마가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특히 후자)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서양적'사고방식과 '서양적' 정치 전통(특히 민주주의)이 생겨나는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 속성이 유달리 많이 전파된 곳이 유럽이다. 잠시 이슬람의 중요성이 부각된 때도 있었으나, 세계사의 동력은 약 800년 무렵에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 치세를 시작으로 '유럽'이 '흥기'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고유하고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문화는 십자군 전쟁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1500년 이후 유럽 문명의 이득이 나머지 세상에 전해진 '탐험의 시대'가 개막되며 본격적인 힘을 발휘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기술 진보, 자본주의, (합리적이고 제한된 통치를 지향하는) 유럽식 정치 구조, 민주주의 등도 바로 '서양 문명'의 힘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술에서는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세계 나머지 지역의 역사가 별개로 분리된 것이 되며, 이 나머지 지역은 유럽의 거침없는 진격으로 만들어진 '세계 문명'속으로 휩쓸려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좀 더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유럽이 세계사에서 그 어디보다도 특권을 가지는 곳이자, 변화와 발전을 특징으로 갖는 곳이 된다. '서양'이 그러하다면, (유라시아의 나머지 지역인 '동양'은 '서양'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전반적으로 비합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정적이고 정체된 곳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접근법을 일절 거부한다.

(특히 1500년 무렵 이후의) 유럽 문명과 관련된 문제는 이렇듯 '서양문명적' 접근법에도 나타나지만, '문명'을 세계사의 핵심 단위로 보는 다른 접근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토인비는 서양의 기독교를 하나의 문명으로 보면서 그에 함축된 결과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서양의 기독교가 (토인비가 발견했다고 믿은) 역사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면, 기독교 역시 쇠락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토인비가 원한 전망이 아니었고,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를 피할지에 대한 고민이 토인비의 저작 후반부를 상당 부분 차지한다. 서유럽 '문명'의 등장과 전 지구적 확산이 세계 문명들의 상호작용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분명 사실이다. 맥닐도 이런 변화가 진행된 시기(즉 19세기 중반)를 중심으로 삼아 책의 결론 부분을 끌어갔다. 그 결론은 그리 명쾌하지 않았으나 책에서 맥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역사는 현재 '서양이 발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맥닐이 책을 썼던 1950년대는 그런 전망이 당연하게 비쳤을지 모르나 21세기 초는 그렇게 자신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구의 발흥』 출간 25주년을 맞아 쓴 놀라운 자기비판의 글에서 맥닐도 자기의 위대한 저작에 커다란 결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1500년 이후 서유럽에 의해 통합된 세계경제가 탄생했다는 사실, 나아가 서유럽이 (북아메리카의 후손들과 함께) 그 경제의 주요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경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명'을 기반으로 한 세계사는 경제적·사회적 역사를 경시할 수밖에 없음을 일부 인정했다는 뜻이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1970년대 이후에 이룬 연구 업적과 그의 '세계 체제론'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 체제론은 1500년 무렵에 세계사에 근본적인 단절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1500년 무렵에 유럽은 자본주의를 세계 체제로 탄생시키기에 이르는데, 자본주의는 (이전의 착취 체제와는 달리) 어떤 정치 제국과도 직접적 연관을 갖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 재편되어, 부유하고 산업화된 국가가 주축인 '핵심부'와 후진적이고 의존적이며 농경 위주인 국가가 주축인 '주변부', 그리고 그 사이의 '반(半)주변 지대로 나뉘었다. 일부 역사가는 이런 구분법을 확장해 다양한 종류의 세계 체제 개념을 1500년 이전 시기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부 타당성은 있는 작업이기는 하나, 완성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반면 월러스틴은 이런 시도를 일절 거부하면서, 세계사의 독특한 상황은 1500년 이후에나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월러스틴의 접근법 역시 심각한 유럽 중심주의의 문제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월러스틴의 이론은 세계의 역동적 요소를 오로지 서유럽으로만 보며, 서유럽이 1500년에 이미 여타의 오래된 사회 및 경제를 재편할 힘을 갖고 있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월러스턴의 관점과는 달리 서유럽은 상당 기간 그럴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고 본다. 심지어 서유럽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시아의 공동체들(특히 인도 및 중국)과 동등한 상황에 설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바다.

월러스틴이나 그의 논적들(이들은 재산권과 개인기업, 자유, 부의 창출과 집적,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모든 혜택, 제한된 통치와 민주주의 등 이른바 '유럽의 기적'을 옹호한다.)만 서유럽이 경제적·사회적 면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19세기 유럽을 지배한 세계관을 상당 부분 반영했고, 특히 진보가 인간 역사의 뿌리를 이룬다는 믿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역사가 원시 공산주의, 노예사회, 봉건주의, 자본주의의 고정된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는데,(그 뒤에는 공산주의가 찾아와 필연적 승리를 거둔다.) 전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유럽이 겪었던 경험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역시 영락없이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설령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다른 사회의 경험을 고려했다고 해도,(혹은 알았다고 해도) 보통 그것을 '동양의 전제주의' 정도로 치부하는 데 그쳤다. 이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유럽의 과거를 토대로 만든 이 모델에 모든 인간 사회를 끼워 맞추려고 시도해 왔다. 그래도 마르크스가 중요하기는 한데, 모든 인간 사회가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사회는 지배적 위치의 엘리트층이 (그리고 국가들이) 사회 대다수 성원이 생산한 잉여물을 자기들 이익에 맞게 전용(專用)해 왔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문명'이라는 개념도 결국에는 최초의 농경 사회가 잉여 식량을 생산해 비생산자들(사제와 통치자, 군인, 장인)을 부양하면서, 이로써 좀 더 복잡하고 구조화되고 위계적인 사회가 탄생한 데 그 토대를 둔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문명'이라는 용어도 바로 이런 뜻이다.) 물론 처음에는 사람들이 공동체 일반의 목적을 위해 잉여 식량을 자발적으로 내놓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은 얼마 안 가 착취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흐름의 제1단계에서 변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잉여생산물의 성격뿐이었다. 처음에 잉여 생산은 농업에 기반을 두었지만, 차츰차츰 기술 발전을 통해, 그리고 좀 더 대규모의 에너지 자원 이용을 통해 새로운 기회들이 열렸다. 이로써 사회는 산업적 성격을 띠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마르크스는 이 후반 단계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며 유럽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무언가로 여겼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이런 접근법을 거부한다. 인간은 투자와 교역, 사업을 통해 수익과 이득을 추구하는데, 그러한 인간의 물욕은 역사 전반에 걸쳐 모든 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알고 보면 그러한 활동이 처음 대단위로 발달한 곳도 중국이었지 유럽은 아니었다. 1600년 무렵 이후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전환도 그런 활동의 성격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화석연료 에너지로의 급격한 전환, 나아가 새로운 산업 기술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둘은 단순히 인간 물욕의 힘이 작동하도록 좀 더 거대한 기회를 제공했던 것뿐이다. 따라서 그 밖의 다른 이론들, 이를테면 유럽 특유의 자본가 정신이 청교도 윤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점 역시 유럽 중심주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거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문제들을 이 책은 어떻게 다루고자 하는가? 유럽 중심적인 관점은 거부하고, 세계의 그 어느 지역에도 편중되지 않는 훨씬 폭넓은 세계사의 관점을 취할 것을 지향한다. 그 방식은 일차적으로는 연대순이다. 세계 모든 지역에 존재한 인간 공동체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 서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첫 번째 부분에는 가장 짧은 분량에 가장 긴 기간의 이야기가 담길 텐데, 인류의 진화와 전 세계로의 확산, 그리고 인류의 유목 생활과 채집 생활을 다룬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근본적이었던 전환, 즉 농경의 채택과 거기서 생겨난 정착 공동체에 관해 다룬다. 아울러 세계 여기저기에서 '문명'이 독립적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핀다. 2부의 마지막 장(5장)에서는 이 과정이 아메리카 대륙 및 태평양 연안에서 진행된 모습을 다루면서, 이들 문명이 유럽인과 최초로 접촉하게 될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 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이 지역이 고립된 채 자기들만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문명을 발달시키기는 했으나, 유럽인과 조우할 당시 사회적·경제적 수준이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유라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여기서 2부를 마무리한다.) 3부와 4부는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인 유라시아의 역사가 주 내용이다. 3부는 초기 농경 제국들의 역사를 기원후 600년까지 담아낸다. 4부는 이슬람의 흉기가 가져온 근본적인 전환으로 시작해, 약 1000년 전에 중국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변화를 살핀 후, 몽골족의 영향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5부에서는 다시 한번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는 한편 아시아에 오래 존립했던 사회들과 처음으로 직접 접촉한 후 세계의 판도가 어떤 식으로 균형을 이루었는지 자세히 살필 것이다. 이 마지막 5부에서 현대 세계의 등장과 함께, 지난 250년동안 일어난 대규모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세계사의 관점에서 다룰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서사 속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주제가 흐른다. 첫번째 주제는 세상에 제각각 등장한 문명들이 어떻게 서서히 서로 접촉해 갔는지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경우에는 초기 단계부터 접촉이 있었다. 그 뒤 수천 년이 걸려 인더스강 유역, 나아가 중국에까지 접촉이 이루어졌다. 유라시아 대륙 양끝은 애초에 간접적으로 일부 접촉이 있다가, 종국에 모두가 서로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유라시아는 그 어느 지역도 장기간 고립을 겪은 일이 없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 어떻게 중대한 사상과 기술, 종교의 전파가 이루어졌는지가 두 번째 주제다. 결국 세계사에서는 이런 것들이 각 문명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 모두의 역사는 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이따금씩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앞서거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도 했지만, 종국에 가서는 모든 독점이 무너지고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다른 사회로 전해졌다. 예를 들어 기원후 600년을 기점으로 500년 동안 중국은 유달리 생산적인 면모를 보였다. 인쇄술과 종이, 나침반, 화약, 발달된 철기 기술이 다른 데보다 먼저 발명되어 나온 것인데, 결국 모두 다른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18세기 중엽 이후 약 100년 동안 서유럽도 여러 산업적인 변화를 이끌었지만, 이 역시 급속한 속도로 전 세계에 확산되었다. 그 속도가 한 차원 빨라졌다는 것은 곧 다양한 인간 사회의 통합이 더욱 증대되었다는 뜻이며, 통합의 증대는 세계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주제로는 문명의 '핵심' 지역 확대를 들 수 있다. 최초의 문명화된 사회는 모두 자기들보다 발달이 덜한 ('주변')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들 지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착취의 영향, 나아가 착취에서 비롯된 좀 더 발전한 사회와의 접촉이 주변부의 상류층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좀 더 힘을 기르지 않을 수 없었고, 나아가 자기네 국가의 원시적 구조를 자기들 능력으로 발달시켜 발전된 지역과의 접촉을 제힘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루어진 것이 점진적인 '문명'의 확산이다. 이 과정은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초기 국가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 영향력은 레반트에 미친 뒤,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를 차례로 통합했고, 이어 이탈리아와 이베리아반도, 마지막으로는 서유럽을 훨씬 광대한 '문명화된' 지역 안으로 끌어들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중앙의 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문명이 서서히 뻗어 나갔으며, 결국에는 이것이 창장강 이남의 고도로 생산적인 땅(논을 이용한 집약적인 쌀농사에 적합했다.)에 진입한 것이 가장 주효했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상당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과정이 약 1000년 전에 진행되어, 그 지역 고유의 원시 국가들을 발달시켰다.

네 번째 주제는 정착 사회와 그들을 둘러싼 유목 집단 사이의 관계다. 예로부터 전자는 후자를 '오랑캐'라 부르며 그 모습을 말을 타고 물밀듯 몰려와 문명화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가차 없는 싸움꾼으로 그리곤 했다. 이는 근본부터 잘못된 오해다. 유목 사회 자체가 정착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고, 유목민의 생산품 상당수도 정착 사회에 의존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유목민이 성공한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정착 공동체를 군사적인 면에서 앞질렀기 때문이다. 말 탄궁수는 싸움에서 밀린다 싶으면 언제든 스텝 지대로 퇴각할 수 있었기에, 이들이 패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자 정착 사회에서는 '오랑캐'와 싸우기보단 그들을 매수하는 것이 더 손쉬운 방책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특히 대를 이은 중국 왕조들은) 겉으로는 자기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고자 했고, '조공'도 그들이 아닌 유목민 쪽에서 바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유목민들은 문명화된 세계를 대규모로 공격하느니 그들의 생산품을 취하는 것이 현실적 면에서 더 낫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런 유목민의 수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명화된 지역의 확장(이는 유목 세계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는 일이기도 했다.)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기저에서 작용했는데, 주변부에서만나는 다양한 산물에 대한 수요도 그러한 원인 중 하나였다. 세계사를 이루는 다섯 번째 주요 주제는 바로 교역이다.(점차 높아지는 교역 수준, 좀 더 대규모가 되는 교역 상품, 계속 늘어나는 교역 거리 등을 다룬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상인과 무역업자가 문명의 가장 초창기부터 나타나 최초의 도시들에서 각양각색의 물건을 사고팔았다. 이는 레반트는 물론, 멀리 페르시아만 아래의 오만(Oman), 산맥 너머의 이란고원지대, 머나먼 북쪽 땅 아나톨리아 및 종국에는 인더스강 유역에서까지 이루어졌다. 이런 교역은 애초에 사치품에 주로 한정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접촉과 부를 증가시키는 데 교역이 한 역할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부피가 큰 물품도 꽤나 일찍부터 교역되었고, 육상 통신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교역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물품을 손쉽게 옮길 수 있는 바다와 강을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교역에 주로 의존하는 도시들은 초기 단계에 이미 등장했으며, 거의 모든 통치자와 국가가 부유한 상인과 도시에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통치자들이 겪어 본 결과 교역에 세금을 매겨 조세를 거두는 것이 결국에는 최선책이었기 때문이다. 교역이 이루어지자 지중해와 인도양에서는 서서히 두 개의 거대한 '해양 세계'가 생겨났고, 후자는 페르시아만에서 시작해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지역을 하나로 연결했다. 이 해양 세계를 통해 광범위한 교역망과 대규모의 기술적·종교적 접촉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그 어떤 국가나 제국의 범위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육지를 통하는 주요 경로에는 '비단길'이 있었고, 종국에 이 길이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통해 중국과 동부 지중해를 연결했다. 위대한 세계종교 중 일부도 이 길들을 통해 전파되었다. 이러한 전파의 일부는 무역업자들이 담당했고, 그들과 함께 이동한 순례자와 교사들도 전파에 한몫했다. 세 번째의 해양 세계는 대서양에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이후 유럽에 의해 형성되었다.

여섯 번째 주제는 유럽이 세계사 내에서 점하는 위치다. 문명이 최초로 등장하고 약 5000년 동안에 유럽은 대체로 주변부의 위치였다. 1000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국가의 구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이란, 인도, 중국에 장기간 존립한 사회와 경제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참 뒤쳐져 있었다. 세계사가 전개된 시간의 대부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달된 사회는 아시아에 자리했다. '서양 문명'의 관점에서 쓰인 설명들은 대부분 이러한 불편한 사실은 무시한 채, 영웅적인 '탐험'의 시대에 이미 유럽이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번창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근본부터 잘못된 오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에 무역이 개시된 이래, 적극적으로 '동양'의 물품을 원한 것은 '서양' 쪽이었다. 문제는 서양에는 '동양'이 교역하고 싶어 하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귀금속들이 물건 값의 명목으로 끝없이 '동양'으로 흘러들어 갔고, 결국 금괴가 바닥나면서 교역도 쇠퇴했다. 그러다가 1500년 이후 상황이 바뀌는데,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착취한 어마어마한 부의 원천을 활용해 인도양에 장기간 존립한 부유한 교역 세계를 서서히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 5부의 주된 논지는 유럽이 1500년부터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고 보는 것은 실수라는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자기들 뜻대로 움직인 것은 맞지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고립된 대륙의 기술 수준이 현저히 낮았던 데다, 대륙 사람들이 유라시아의 질병에 대한 자연면역 체계를 갖지 못해 예기치 않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거대한 중국 제국에 미미한 영향밖에 미치지 못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한 일이라곤 기껏해야 연안을 따라 교역 기지를 건설하는 것 정도였다. 따라서 1500년에서 1750 년 사이는 유럽이 서서히 '동양'의 거대 제국에 맞먹는 부와 힘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곱 번째 주요 주제로 이어진다. 오늘날 세계, 즉 산업화와 급속한 기술변화, 고도의 에너지 활용과 도시화된 사회가 특징인 세계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농경을 채택한 이래 모든 인간 사회는 거의 내내 일차적으로 농경 사회였고,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교역에서 발생하는 부가 차츰 늘고, 사회 기반 시설이 발달하고, 더디게나마 기술이 발전했으니, 농경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회가 하나쯤 등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중국도 11~12세기에 이런 사회를 거의 이룰 뻔했으나, 여진족과 몽골족에 차례로 침략당하면서 실패했다. 어쩌면 수 세기 동안은 유럽보다 훨씬 부유하고 발달했던 이슬람 세계 역시 산업사회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전환을 맨 처음 이루어 낸 것은 유럽이었다. 그리고 전환의 기반은 유럽이 유라시아 나머지 지역의 기술과 사상을 광범위하게 채택한 데 있었다.(강철 용광로와 종이, 인쇄술, 화약, 시계 장치, 나침반, 선미재와 키, 등자, 복잡한 금융과 회계 기법, '아라비아 숫자, 0의 개념 모두 유럽 바깥에서 만들어졌고, 심지어 증기기관의 기본 요소조차 최초의 발달은 중국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변화의 최종 결실을 통해서, 그리고 18세기 중엽 이후 이루어진 산업 발전을 통해 잠시나마 서유럽(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터를 잡은 서유럽의 후손)이 나머지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나머지 세계에서는 서유럽의 패턴을 채택하지 않았다. 현대의 사회적·경제적 진화는 전 세계에 걸쳐 진행된 것이지,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머지 세계가 단순히 한발 늦게 되풀이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사회 변화는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각자가 처한 제약이 서로 달랐던 만큼 다른 사회에 비해 유달리 성공하는 곳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유럽이 끼친 영향은 일시적이며 제한적이었다. 일본이나 중국 같은 나라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알았던 만큼, 유럽이 미친 영향은 '서양 문명' 개념의 신봉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수준이었다.

이 책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한데 엮여있다. 이제껏 곳곳의 인간 사회는 그 토대가 매우 유사했고, 따라서 다른 사회라도 무척 비슷한 문제들을 맞닥뜨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저마다 달랐으며, 사회와 제국, 국가는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호 간의 접촉을 통해 갖가지 사상과 기술이 전파되었고, 각 지역은 나머지 지역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채택해 썼다. 궁극적으로 보면 인간 집단 중에서 홀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집단은 없으며, 따라서 문화적·기술적 유산도 어느 한 곳만 독특하게 가지고 있기는 어렵다. 모든 사회는 오가며 반복되는 사상의 전파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만 해도 대체로 약 1500년 전에 앵글로색슨족의 영향을 받은 게르만족 언어이지만,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요소가 매우 강한 것은 물론 그 외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의 말이 들어 있다. 영어의 알파벳은 약 3000년 전 레반트의 페니키아인이 발명했으며, 역시 여러 곳에 원천을 두고 있다. 이 책의 면지 아래에 매긴 숫자는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표기법이라고 부르나, 십진법 표기와 마찬가지로 개념의 기원은 사실 인도다. 이 책이 인쇄된 종이는 중국의 발명품이다. 인쇄 역시 불과 십수 년 전이었다면 중국식에 기초한 가동 활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15세기의 유럽에서 이용된 가동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곳은 한국이었지만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세계사 집필을 시도하면 (탈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글을 쓸 때는 더더욱) 민감하게 제기되는 것이 용어의 문제다. 이와 관련해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할 명칭이 몇 가지 있다. '극동(Far East)'은 19세기에 영국 외무부에서 만든 용어이며, 중동(Middle East)과 근동(Near East) 역시 비슷한 군사적 용어로 다양한 사령부 지역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도 중동과 근동 개념은 특히 쓰기가 곤란한데, 두 가지의 주요한 오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중동과 근동은 그리스를 (유럽의 일부분으로 보고) 배제하고 있다. 사실 현재의 터키 서쪽 국경선에 선을 긋고 그곳을 '아시아'의 시작으로 본 것은 역사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지중해 동부와 그리스, 에게해, 아나톨리아는 보통 하나의 단위를 이루었으며, 이 지역은 거의 늘 서양보다 동양에서 중심 세계의 역할을 해 왔다. 둘째, 중동과 근동의 개념에는 이란이 포함되는데, 사실 이란은 이제껏 인접한 서부와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여 왔다.(물론이란계 제국들이 이들 서쪽 지대를 장악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란은 서쪽과도 접촉이 많았지만, 동쪽의 인도와 내륙의 중앙아시아와도 그만큼 빈번하게 접촉했다.(맥닐의 아이디어를 채택해 유럽을 '극서(Far West)'로 부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 역시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의 중심 개념은 유라시아가 단일한 역사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Herodotus: 흔히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로 부르나, 이 역시 '서양 문명적' 관점이다. 중국에도 똑같은 시기에 역사를 집필한 역사가들이 있었으니까.)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별개로 치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제적으로 한 덩어리나 다름없는 땅에 …………) 왜 세 개의 명칭을 부여해 왔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유럽을 아시아와 별개로 여기는 생각에는 '유럽'에 흔히 나타나는 특정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존재는 지리학적 사실이며, 이제까지의 역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아시아'라는 용어는 이 지역 거주자들도 최근에 들기 전에는 잘 쓰지 않았던 만큼, 이 책에서도 '유럽'에 반대되는 말이 필요할 때만 부득이하게 '아시아'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유라시아를 단일한 대륙으로 다루어야 하는 까닭은 유럽이 대륙이 아닐뿐더러, 인도도 확실히 아대륙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인도가 아대륙이라면 유럽도 아대륙이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유럽은 (인도를 남아시아로 볼 경우에 특히) 서아시아로 보아야 맞지만, 이 용어는 너무 생경한 까닭에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유라시아·아프리카라는 용어도 있으나 너무 조잡해 보여 역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이 책의 유라시아에는 대륙의 나머지 지역과 역사를 공유했던 아프리카 지역도 포함해야 한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가 특히 그렇고,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여행길이 열린 이래로는 서아프리카도 여기에 포함되며, 페르시아만과 인도, 중국에서 오는 배들의 교역로로 이용된 이래로는 동아프리카도 포함된다. 이 책의 용어들은 주로 지리학적 뜻에서 이용되었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서남아시아는 아나톨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멀리 남쪽의 이집트까지 포함한다. 이란과 같은 현대적 지명은 지리적 편의성을 위해서만 이용했을 뿐, 현대국가와의 연관성은 전혀 함축하고 있지 않다.

연대에서도 주요한 문제가 몇 가지 제기된다. 당연히 '고전 시대'나 '중세 시대' 같은 용어는 역사에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데, 특정종류의 '서양적' 역사관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구분을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 역사에까지 활용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런 구분법을 모두 피하고자 하며, 세계사를 하나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BC(기원전)와 AD (기원후)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서양의 기독교 사관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다. 더군다나 AD의 사용은 (비록 그 시초가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기독교의 공통된 관점이 아니다. 비잔티움 제국 교회력에서는 그리스도 탄생 5508년 전을 기원으로 잡았으니, AD 800년은 곧 6308년을 의미했다. 이 책에서는 연대에 'ㅡ'와 '+'를 사용하는 방식도 취하지 않을 텐데, ''의 모양이 대시(-)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BCE(Before the Common Era: 공통 시대 이전)와 CE(Common Era: 공통 시대) 표기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물론 최근 1000년의 역사는 별달리 헷갈릴 일이 없으므로 CE 표기를 생략한다.(우리말의 '기원(元)'은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점의 일반적인 말로 쓰이므로, BCE와 CE도 종전처럼 '기원전'과 '기원후'로 번역하기로 한다. ・옮긴이)

명칭의 음역은 편의를 위해 '서양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형식을 이용하기로 한다. 해당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음역이 없을 때에는 원어를 살린다. 이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중국어 음역이다. 이 책에서는 최근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현대식의 병음 표기 대신에 웨이드-자일스 표기법(Wade-Giles system)을 따랐다. 따라서 왕조의 명칭에서 진(秦)을 Qin이 아닌 Ch'in으로, 송(宋)을 Song이 아닌 Sung으로 표기했으며, 베이징 역시 종전대로 Beijing이 아니라 Peking으로 표기했다. 이렇게 한 것은 편의와 익숙함의 문제를 일부 고려해서다. 향후 몇십 년 안에는 병음 체계가 더 널리 쓰이게 될 것이다.

역사가 중에는 세계사의 집필이라는 구상을 시답잖게 보아 온 이가 많다. 광범한 일반화를 꾀하다 보면 중요한 세부 사항을 놓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모든 역사 서술은 결국 얼마나 일반화를 하느냐, 얼마간의 세부 사항을 어떻게 배제하느냐의 문제다. 모든 것을 완벽히 담아낼 수 있는 서술은 없으며, 역사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를 선별해 내는 작업을 거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세계사는 한 그루의 나무보다는 숲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인류 역사를 형성한 주요 요인들을 적절한 수준의 분량 내에서 나름대로 고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에만 집중해서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 각 사회가 맺은 연관성과 교류, 다양성 안에 내재한 통일성을 놓칠 위험이 따른다.

'To World (output) > 유료 習'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 수상 축하합니다^^  (3) 2024.10.11
행정에서 말하는 정책!?!  (2) 2024.10.04
오늘 신선했다!  (4) 2024.08.30
보는 눈 : 앙리  (0) 2024.08.27
대포차 - 집단 지성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0) 2024.08.25